`김훈`과 <칼의 노래>

칼의 노래 - 8점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어도 옆으로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칼이 끝나는 곳에 한 개의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쇠의 극한이었다. 칼은 그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듯 했다. 칼날 위에서 쇠는 맹렬한 기세로 소멸하고 있었다. 쇠는 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고, 그 경계를 따라 칼날은 아슬아슬한 소멸의 흔적으로 떠 있었다.

죽은 여진의 가랑이 사이에서 물컹거리던 젖국 냄새와 죽은 면이 어렸을 때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와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화약 냄새와 비벼졌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이도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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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찹만땅 | 2009/04/28 13:37 | 나의 서재와 책 한권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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