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 한국 민주주의 분명 후퇴"

우리사회 보수·진보는 서로 공감 가능, 민주주의·개인자유 등 공통가치 지향
"참여정부도 그랬으니 우리도…" 인식 안돼, 집권세력, 반대 허용하는 관용 없으면 망해


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선생은 당신을 자유주의자라 했다. 자유주의가 "근대 정치전통에서 보자면 진보주의에 깊숙이 발을 담근 사상"이지만, 그의 자유주의는 보수적 가치, 그 전통과 지혜와 철학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라는 말을 덧댔다.

이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가치, 보수의 덕목, 여유와 포용의 문화를 이야기하며 이따금 말을 삼켰고, 두어 번은 언성을 살짝 돋우기도 했다.

그렇게 돋치려던 한 대목에서 선생은 미국의 저명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의 말- 집권자는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만 둘러싸이지 않도록 하루 세 번씩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을 인용하며 음성을 다독였다.

선생에게는 '문화적 성찰'을 주문했다. 정치 경제 등 공적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로서의 문화, 요컨대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태도와 행동을 근원적으로 안내하고 지배하는 가치 및 신념의 체계로서의 문화"라는, 선생의 프리즘에 걸러진 명료해진 세상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서울대 교수 시국선언 현장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죠.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이 몰려가 소란을 피웠는데 학생들이 막았어요. 교수들이 뭔가를 발표한다고 하면 들어줄 여유가 있어야죠. 사회가 긴장국면에 놓이거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수들이 발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전통이고, 또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없다면 죽은 사회일 겁니다. 주체가 진보냐 보수냐는 사실 중요치 않죠. 지금 나오고 있는 시국선언들은 무슨 정치적 입장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위기를 맞아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표명입니다. 민주사회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권리지요."

-민주주의의 후퇴가 그렇게 우려할 만하다고 보시는지.

"120여 명이 서명을 했는데 청와대 한 관계자가 '서울대 교수가 총 1700명인데…'라고 말했다죠. 개인의 독자적 행동이나 판단을 존중하기보다는 집단의 크기를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설혹 소수라 해도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숫자를 계량화해서 보려는 시각은 천박해요. 교수들의 선언에 나는 동조하고 그 행위를 지지합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한참 후퇴했지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이제 막 쪼작쪼작 걷기 시작한 단계인데 도로 주저앉게 됐다는 위기감이 높습니다. 구체적 증거요? 수 백 가지는 됩니다.

선생은 집회ㆍ결사ㆍ사상표현의 자유 등 헌법이 규정한 시민의 기본권부터, 참여정부가 지향했던 '새정치'가치의 후퇴 사례 등을 언급했다.

-민주주의 후퇴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통령이 져야 할까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밖에 없지요."

-시민사회의 책임도 있을 텐데요.

"있죠. 시민사회는 집권세력 못지않게 조급한 데가 있어요. 의사가 수용되지 않으면 쉽게 흥분하고 타협에 서툴고 이성을 잃을 때가 많아요. 하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져야 합니다.

국민들이 거부하는 일이 있으면 설득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놓을 줄도 알아야죠. 참여정부는 수도 이전안을 내놓았다가 반대가 심하자 포기했습니다.

물론 지도자의 판단과 비전에 따라 강행해야 할 일도 있을 겁니다. 박통 시절의 경부고속도로가 그런 경우죠. 이 정부에게는 4대강 사업이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경제만 살리면 다른 건 다 정당화된다는 생각은 군사정권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민주주의는 고속도로 만드는 일보다 훨씬 힘들고 더딘 길입니다."

선생은 87민주화항쟁 20주년이던 2년 전 한 기념강연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시민사회의 열망과 좌절의 궤적으로 정돈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불꽃같은 열망이 한 순간의 폭발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오르려면 그 불꽃을 지탱할 기름, 곧 튼튼한 시민적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지금 우리 사회의 우세한 열망은 무엇이며, 어떤 기름이 필요할까요.

"지금 우리 사회의 지배적 열정은 경제 번영과 물질적 풍요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경제 번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의 하나입니다. 다른 중요한 수단은 자유, 곧 정치민주주의죠. 이 두 가지 수단 중에서 어느 하나만 강조되면 국민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절대빈곤을 극복한 것은 박통 시대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군사통치는 국민 저항에 부딪혀 종식되었지요. 경제 안정과 정치발전을 함께 이루어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를 향한 길입니다.

민주주의의 열정은 불꽃같지만 그 불꽃을 관리할 능력, 민주주의를 지킬 시민적 역량이 필요해요. 그 역량 없이는 민주사회가 요원하고, 민주주의가 유보되면 경제 발전도 의미 없어집니다.

권위주의로 회귀해서라도 경제만 발전시키면 된다? 그건 아니죠. 자유로운 사회, 인간적ㆍ시민적 권리가 억압되지 않는 사회, 평등한 사회는 근대국가의 제1책무 아닙니까."

현 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은 뜻밖에 거세고 완강했다. 천박해지는 것을 무릅쓰고 물었다.

-이념과 사상의 스펙트럼에서 선생님의 자리는 어디쯤이신지.

"'리버럴'(자유주의자)입니다. 그렇지만 보수적 가치와 보수주의 철학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리버럴입니다."

인터뷰이의 얄팍한 질문이 아무래도 못마땅했던지 긴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사회의 좌우구분은 문제가 많아요. 좌파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사회 정의는 평등, 자유, 공정성이겠죠. 이는 자유주의 정치 전통에서 진보로 불립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면 기존 질서의 변화를 모색하죠. 하지만 현대 보수주의자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부정하는 이는 없죠. 개인의 자유도 상당 부분 보수주의적 가치에 속합니다.

그런 면에서 진보적 보수가 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 상당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근대국가와 근대정치를 형성해온 사상적 가치를 두고 좌파 빨갱이 낙인을 찍어대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추구해야 할 공통의 사회적 이상이 분명히 있어요. 공감의 공간이 많다는 얘기죠."

선생은 이 대목에서도 집권세력, 우파의 관용을 요구했다. "참여정부도 포용과 관용이 없지 않았느냐, 너희도 그랬으니까 우리도 그런다 식으로 해서는 한 발도 못 나가요. 어떤 집권세력도 반대를 허용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민주정치의 필수 덕목은 반대자를 허용하는 일입니다. 관용은 자비가 아닙니다. 그게 없으면 집권세력 자신이 자빠집니다."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시민학' 강좌의 개설을 제안하셨죠? 전 그런 교육이 더 어린 나이에서부터 이뤄져야 하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습관, 함부로 타인을 욕하고 손가락질하지 않는 태도, 토론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노력… 이런 것은 민주시민의 기초 역량이고 이는 어려서부터 다져지고 길러져야 합니다. 진보의 가치, 보수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죠. 아이들에게 '엄마 말 잘 들어'라거나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가르치는 것만이 능사여서는 안 됩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으로 아이들이 자기 판단과 생각을 키우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런 훈련 부족이 우리 사회를 "개인은 흐릿하고, 이기적 개인주의만 뚜렷"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자기의 좁은 이해관계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족이나 집단의 생각과 판단에 기대고, 소속된 조직의 논리에 길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선생은 지난 해 낸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이라는 책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문명에 대한 세기적 상상력을 장엄하게 펼쳐 보인 바 있다.

-책에 쓰셨던 '모순에 대한 무지에의 열망(의지)'이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심각한 문제와 모순이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무의식적 의지를 말한 겁니다. 거의 본능적인 성향이지요. 문제를 똑바로 응시하려는 정신습관은 그래서 고귀한 문화자산입니다. 반성할 줄 알고 공정성과 객관성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은 지식인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 온 사회에 필요한 덕목입니다."

인터넷 한국일보 / 최윤필 기자

by 케찹만땅 | 2009/06/11 15:26 | 세상만사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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