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홍길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인물한국사]

[홍길동전]

허균

허균(許筠, 1569~1618)은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였다. 허균은 분명 시대의 이단아였다.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허균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준격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이 나붙었는데 이것이 결국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판명되면서 더 이상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 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이 옥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광해군 10년 8월 24일 인정전 문에서의 국문은, 허균이 자신이 비록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국문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기자헌은 허균의 죽음이 무고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과연 허균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왜 이 시기에 정권으로부터 축출되고 끝내 삶을 마무리해야만 하였을까?

명가의 후예, 자유분방한 삶

허균의 부친인 허엽의 사망 사실을 전하는 기록에서는 허균이 속한 집안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허 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의 하나였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엽이 초당을 호로 한 것은 그의 처가와 관련된다. 즉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인 허봉은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이 있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시.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그의 생활은 매우 자유분방했던 듯하다. 허균은 평소 “참선하고 부처에게 절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어서 여러 명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으며, 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서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요즈음 같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기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아끼던 부안의 기생 계생이 죽자,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竊藥去人群)…”라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계생은 유명한 부안 기생 매창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한 허균의 발언의 통해서 그의 생활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허균의 생활 태도는 학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글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 내려 갔다. 그러나 허위적인 책을 만들기 좋아하여 산수나 도참설과 도교나 불교의 신기한 행적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광해군일기])고 평가되었다. 그의 행동과 학문은 분명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적 굴곡의 삶

허균의 관직 생활은 선조 27년(1594) 과거 급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사관직인 검열을 비롯해 세자시강원설서등을 지내다가 황해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자기를 시종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서는 거침없이 행동하면서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밖에도 그는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허균의 정치적 생애는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칠서지옥이란,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심전의 서자 심우영, 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상산군(商山君) 박충간의 서자인 박치인과 박치의, 그리고 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를 말한다. 이 옥사는 평소 신분적 울분을 안고 생활하던 이들 7명의 서자가 옥사가 발생하던 이전 해에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사건으로 비롯되었다. 이 옥사는 서자들의 죄를 다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7명의 서자 가운데 심우영은 허균의 제자이기도 할 정도로 허균은 평소 이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허균도 이 일로 인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옥사에서 허균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의 입장에서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후원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허균이 선택한 인물이 당시 대북세력의 실력자인 이이첨이었다. 허균과 이이첨은 같은 글방 동문이었다. 결국 허균은 당시 실력자 이이첨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옥사에서 일단 화를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호조참의와 형조판서 등을 지내는 등 정권과 밀착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하였다. 바로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을 비롯해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民家)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홍길동전], 교산 허균의 꿈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홍길동전]하면 허균, 허균하면 [홍길동전]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는 아니다. 그런 만큼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홍길동전]의 찬자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기는 하다.

허균의 저서인 [성소소부고]에는 허균의 생각을 담고 있는 여러 편의 글이 있다. 학문의 목적과 진위를 논한 [학론(學論)]을 비롯해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함을 논한 [병론(兵論)]이 있으며, 허균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하는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도 포함되어 있다. [유재론]에서 허균은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므로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얼이라서 인재를 버리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버리는 인재를 버리는 것을 개탄하였다. 한편 [호민론]에서는 “천하의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다.”라고 전제한 뒤 백성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는 호민을 가장 두려워할 존재라고 하였다.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성소소부고]권11, ‘호민론’)

허균의 호 가운데 하나가 교산(蛟山)이다. 교산에서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허균의 호인 교산은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허균은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허균의 호민론 일부. 허균은 ‘호민론’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면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사고가 결국
[홍길동전]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고 하겠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인물/역사  발행일  2010.08.09

by 케찹만땅 | 2012/09/20 15:49 | 세상만사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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